遊山西村 유산서촌


陸游 육유

지난 겨울 농가에서 담근 탁한 술을 쉽게 보지 마오

풍년들어 닭과 돼지는 손님 맞기에 충분하니


산도 물도 다하여 길이 없나 했건만

버드나무 깊숙히 꽃 만발한 마을이 다시 하나


피리소리 북소리가 노니니 춘사(春社)에 가깝고

수수한 차림새는 옛 향취를 품었네


이제부터라도 한가로이 달맞이 갈 수 있다면

지팡이 쥐고 밤 어느때고 문을 두드리리라


莫笑農家臘酒渾 막소농가납주혼

豊年留客足鷄豚 풍년유객족계돈

山窮水盡疑無路 산궁수진의무로

柳暗花明又一村 유암화명우일촌

蕭鼓追隨春社近 소고추수춘사근

衣冠簡朴古風存 의관간박고풍존

從今若許閑乘月 종금약허한승월

拄杖無時夜叩門 주장무시야고문








“정치1번지라는 종로가 말이 시내지 시골읍내같지 않느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한 예비후보가 SNS로 전한 메시지는 흥미롭게도 조선후기 중인문학의 주요인물로서 조선후기를 살다 간 장혼(張混, 1759~1828)이 서촌(옥류동, 현재의 옥인동)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연상케 한다.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는 않았다.”[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서울역사박물관 편, 2010) 중]


‘사대문의 중심인 종로에 이웃하면서도 시골 같은 동네’라는 말은 200년 전은 물론, 2012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촌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서촌의 골목길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 지도라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 1902)는 물론, 18세기의 한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도성대지도(都城E大地圖)에서도 오늘날 서촌의 골목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길썰미만 있으면 조선시대 지도를 펼쳐놓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표시할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동네라는 이야기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 문화재청


길이 변하지 않는데 집자리만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자리와 길자리를 모두 밀어버리는 재개발이 아닌 한에야 길이 그대로라면 그 길을 통해 닿았던 집자리의 모양도 크게 달라질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해 알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아도 지금의 지적도와의 차이점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로 관청이 소재하던 서촌에 본격적으로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계급에 따라 주거지가 구분되면서 중인을 비롯한 이서계층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양반도 천민도 아니었지만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던 중인계급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의 대표격인 시인 공동체 ‘옥계시사’도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이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렸고, 추사 김정희는 이들 모임을 위해 ‘松石園’(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옛 모습을 이어가던 서촌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경제공황이 휩쓸고 간 후,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경성으로 지방민들이 급격히 유입됨과 동시에 부동산 경기가 활황을 맞는다.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집이 팔리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20평 내외의 땅에 10평 내외로 지어진 근대 도시형 한옥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촌, 서촌을 막론한 경성 전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250년을 내다본다는 ‘대경성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이라는 도시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큰 필지를 나누어 대량으로 공급됐던 한옥들은 지금도 곧게 뻗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1930년대의 대량주택공급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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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M0014_33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해방 이후, 이완용과 윤덕영이 소유했던 거대한 땅과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집들이 비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서촌은 좀 더 비좁아진다. 경제개발시대에 상경한 지방민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집을 잃은 사람들까지 일부 서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판자집은 늘어나고 한옥집은 칸칸마다 한 가구씩 사는 집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파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눈앞에 두고 진압되었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서촌에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청와대에 인접한 동네라는 이유로 집을 고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주민들의 생활은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처럼 얼마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개발의 엔진 소리가 드높을 때에도 서촌은 그로부터 비껴져 남겨지게 된 것은 분단의 현장이 천혜의 자연으로 돌아온 비무장지대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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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0138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촌은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92년, 인왕산에 맞닿은 누상동이 노후불량주택 밀집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고, 1994년에는 지금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필운대로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신교동에도 좁은 길 사이로 빌라가 들어선다. 당시에 빌라를 짓기 위해 주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기와집이 헐리는 것은 물론 초가집들도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달동네라는 이유로 인왕산과 맞닿은 동네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오히려 큰 도로에 가까운 체부동, 누하동, 통인동에는 기와집들이 많이 남게 된 것은 이러한 전후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래 들어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과 맞물려 누하동, 체부동을 중심으로 한옥수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거환경개선’이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복층 건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커다란 변화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서촌의 골목에는 재개발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드높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에 약속한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 재개발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옥보존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옥보존을 조건으로 더이상 재개발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한옥보존의 갈등은 잦아든 불씨로 남아있다. 옥인동 재개발의 경우,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다.

시내를 걸으며 고층 건물 발치에 조용히 놓여있는 표석을 읽는 것만으로 역사 속의 사건이나 장소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어느 누가 살던 집, 어느 누가 걷던 골목은 그러한 앙상한 기록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비단 흔히 생각하는 거창한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네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풍경은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그 시간의 심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켜를 쌓아온 퇴적의 산물이고 시간의 증거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서촌은 그래서 재현될 수도 모사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기원, 즉 오리지널이 되는 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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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5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은 한성 도읍의 서쪽 동네라는 뜻으로, 인왕산 아래에 있는 동네를 부르는 말입니다. 동이름으로 꼽자면 가장 유명한 효자동부터, 청운동, 궁정동, 창성동, 신교동, 옥인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통의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까지. 서울 도시철도 3호선 경복궁역에 가까운 동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쉬운 설명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북촌 한옥마을이 유명해진 덕분에 경복궁 동쪽이 북촌이고 서쪽이 서촌이라고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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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7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동서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때에 서촌에 사는 사람이 많은 쪽을 서인이라 이름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적어도 수백년은 된 이름일 것입니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활터 다섯 군데인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필운동, 삼청동에 걸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우리가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르기 시작하는 동네가 조선시대에 부르던 범위와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한성 지도를 펼쳐보실 기회가 있다면 지금의 서촌 일대 지도와 함께 번갈아 보며 비교해보세요. 20년 전에 새로 난 길을 빼고 보면, 조선시대 지도의 길이 지금도 그대로 골목으로 남아있는 곳이 서촌입니다. 골목 바닥에는 블럭이 깔리고 담장은 개량 한옥의 붉은 벽돌이나 일식가옥, 때로는 빌라로 바뀌었어도, 조선시대 서촌 사람들이 걷던 길 모양 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골목길 만이 아닙니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까지 이어지는 큰 길은 ‘백운동천’이 흐르던 물길 따라 길을 낸 탓에 폭이 일정하게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아니라 좁았다 넓어지곤 하는 구불구불한 8차선 도로가 되었습니다.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과 골짜기를 경계삼아 작은 동네가 갈리는 이유로, 앞서 꼽아본 것 처럼 서촌에는 법정동만 열다섯 개에 이릅니다. 골짜기 따라 사람들이 다니던 자취가 골목이 되었고, 골목 끝에 닿았던 스무평 남짓한 자그마한 집자리들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 없이 그대로입니다. 모양 뿐 아니라, 굽이굽이 걷다보면 골목 모퉁이 너머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도, 골목 어귀마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도 예전 그대로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옥인동 재개발구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송석원 일대는 조선의 중인문학으로서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곁으로는 겸재 정선이 살던 인곡정사가 있었고, 겸재는 지금의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수성동 계곡과 송석원이 있던 옥류동을 그렸습니다.

이런 것을 동네의 내력이라고 하는 것인지, 시인 이상이 태어나서 성장했고 시인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을 찾아 하숙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청전 이상범, 박노수, 노천명, 이중섭, 구본웅, 천경자, 김동진 등 길을 걸으며 꼽게 되는 예술가의 이름만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품고 간직해온 동네의 비결은 안타깝게도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못됩니다. 군사독재 시절 내내 청와대에 가장 가까운 동네라는 이유로 아궁이라도 고치려면 신고를 해야 했고, 옥상에 빨래라도 널러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수십년 동안 불편을 감수하고 견뎌온 시간이 결국 다른 동네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 셈입니다.

이런 서촌에 처음으로 찾아온 개발의 파도는 골목과 집들 가운데로 아스팔트 길을 내고 주거환경정비구역 지정으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린 자리에 빌라가 들어서던 1990년대입니다. 산업화 시대에 서울로 밀려들던 인구에 더해 청계천 복개로 쫓겨온 사람들까지 들어오면서 초가집 칸칸이 한지붕 여러가족으로 사는 집이 흔했을 정도로 열악했던 주거환경을 생각하면, 개발이라고 해서 마냥 눈살 찌푸릴 일 만은 아닌 듯도 하지만, 동네가 옛모습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때가 이 때였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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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513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 다음 파도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구역지정이 해제되지 않고 있는 옥인동, 누하동, 필운동, 체부동에 아파트가 들어선 조감도가 동네 곳곳에 붙고, 건설사의 명절 인사 현수막이 내걸리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재개발을 앞두고 어차피 헐릴 집이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루던 집들은 그 몇 년 사이에 부쩍 낡아버린 탓에, 여름에 폭우가 지나간 동네엔 무너진 집을 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집 안에 텐트를 치는 집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으로 그나마 근래에는 집 고쳐짓는 소리가 잦아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낡아버린 집과 아직 재개발이 포기되지 않은 채 갈등을 겪고 있는 옥인동 재개발 구역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새로이 덮쳐오고 있는 새로운 파도는 상업화와 관 주도의 테마파크화입니다. 삼청동과 북촌은 이미 ‘삼청동화’, ‘북촌화’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동네사람 누구나 걱정하는 나쁜 선례가 됐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삶은 아랑곳 없이 오래된 골목과 옛 향수를 자극하는 동네의 모습만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만을 위해 문을 연 상업시설들은 동네를 지켜온 주민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가게가 늘어나면서 부동산 시세가 들썩이면 결국 주민들은 쫓겨나야 하는 운명에 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동네를 보러 오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더 많이 이용하고, 동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더 나은 동네를 위한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관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조성을 본따 동네 곳곳에 가득한 유명인들의 자취를 기념관으로 되살리고 격식 높은 기와지붕으로 동네를 테마파크화하려는 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동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이용해서 동네 사람들이 삶을 일구던 공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기념관과 전시관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동네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그다지 반길 만 한 소식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서촌은 낡은 동네이지만 또한 시간을 품고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삶을 부정하고 개발이익을 쫓는 광풍에서 비껴있던 개발의 비무장지대 같은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집을 헐고 땅을 깎아 아파트를 지어올리는 재개발이 서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다른 곳에서는 동네를 지켜온 삶의 자리를 뒤흔드는 또다른 얼굴을 한 재개발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서촌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를 지나오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도시의 모습인가에 대한 질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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