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인동 154-10번지에 서 있는 낡은 한옥 한 채. 그것은 이상(李箱)이 살던 집이 아니라 이상이 떠난 후 땅이 나뉘고 새로 지어진 집이다. 현재 그 대지와 건물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소유하고 있다.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는 4명의 건축가와 함께 그 집을 허물고 이상을 기념하는 박스형태의 건물을 신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난 지금 현재 상황에서 '터를 기념한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어떻게 토지를 통해서 누군가 혹은 그 누군가의 무엇을 기념하고 기릴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 아무런 유물도 없이 지적도 경계로만 남은 흔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고민. 그것 없이 어떻게 무언가가 기려지고 기념될 수 있을까.

욕된 유물처럼 지워지는 대지의 기억. 우리가 쓰다듬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용도 폐기되는 것들.. 이상이 떠난 후 그가 그의 인생 대부분을 의탁했던 집이 처했던 운명이 그러하였던 것 처럼 지금 저 이상의 집터 위에 위태하게 걸려있는 집이 처한 또 다른 철거의 운명 앞에서 우리는 두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뜨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끝내 그 처절한 질문 앞에서 누군가 납득시킬만 한 변명이 내어지지 못한다면 난 과감히 저 욕된 자들의 이름 위에 침을 뱉고 말리라





일본, 사형장 첫 언론 공개...찬반 논란 - YTN, 2010.8.27.

일본에서는 어제인 27일, 전국의 7개 사형장 중 도쿄도 가츠시카(葛飾)구에 있는 도쿄구치소의 사형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한국 언론은 사형장 공개 경위에 덧붙여 대한민국이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거나 사형장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포함된 사진 보도로 대체했다.

반면 마이니치 신문의 경우에는 사형장으로 가는 과정과 사형장에 들어가는 절차를 통해 사형장의 구조와 분위기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刑場初公開:生と死分ける「踏み板」 執行室14畳 - 마이니치신문, 2010.8.28.
형장 최초 공개:삶과 죽음을 가르는 「발판」  집행실 7평


이번 사형장 공개를 통해 치바 케이코(千葉景子) 법무대신은 사형제도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주문한다. 마이니치의 보도에서 촛점을 맞추는 것은 오히려 사형집행관의 심리적 부담 쪽이었다.

일본에서 국내 소식을 다루는 비중과 한국에서 해외 소식을 다루는 비중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국내 보도 건수나 비중에 비해 일반의 관심은 일본 국내 못지 않아 보인다.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겨울에 집행 된 이래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 사형제 폐지 운동은 힘을 얻는 듯 했다. 여기엔 <데드 맨 워킹>이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같은 영화의 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연이은 연쇄살인과 조두순, 김길태와 같은 아동성폭행 범죄가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사형 집행에 대한 요구는 물론 사형제도 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논란이 다시 떠오를 때 마다 이 사회가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복수심에 가득 차 들끓고 있는 용광로 처럼 느껴진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생각할 때 그 제도 자체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범죄자의 행위를 떠올려 복수심의 날을 가는 행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국가 원수가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수류탄을 던져 암살을 기도한 자가 결국 암살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대에서 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사형이 집행 된 곳은 이번에 공개된 도쿄 구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였고 그 사형수의 이름은 이봉창이었다.

일본의 사형장이 공개됐다는 뉴스와 그 뉴스에 달린 분노에 들끓는 댓글들을 보고있노라니 사형제 존폐 논쟁과는 상관 없이 그의 죽음이 떠올랐다.

(2010.8.28.)
가장 오래된 기억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들이 붙박은 공간은 마당 계단과 부엌에 작은 타일이 박혀있던 개량한옥이다. 그 집 안에서도 안방 아랫목이다. 부뚜막 연탄불 열기가 올라오는 안방 아랫목 위에는 부엌 너머 건넌방 위까지 이어지는, 낮은 천장의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늘 오가며 익숙했던 그 마당도 그 곳에서 내려다 볼 때 만큼은 전혀 다른 공간인 것 처럼 신선했다.

다락
어른들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간신히 드나들던 곳이어서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았던 내게는 나에게만 편한 유일한 공간으로 생각되어 유달리 애착이 갔지만, 잡다한 짐들을 쌓아두고 창고 처럼 쓰던 곳이라 혹여 호기심에 쌓인 물건들을 들추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어른들은 다락에 올라가는 것을 그다지 달가와 하지는 않았다.

건넌방
다락 아래에는 주로 세를 놓던 작은 방이 있었는데, 마당에서 통하는 문과 함께 부엌으로 바로 통하는 문도 가지고 있었던 방이다. 셋방이라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마당에서 계단을 올라 들어가던 방이 마당에서 문턱 넘어 계단을 내려가야했던 부엌과 이어지느라 부엌에서 그 방까지는 낙차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낙차는 미취학아동의 눈으로 봤을 때의 것이니, 지금 다시 보게 된다면 그다지 높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연탄광
그 작은 방 뒤로는 연탄광이 있었는데, 부엌으로만 통했다. 집에서 가장 어둡고 서늘한 곳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대문에서 마당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와 연탄광까지 연탄가루 받치는 깔개를 깔아놓고 연탄을 들이던 장면도 어렴풋 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안방 뒷마루
부엌에서 더 깊숙히 들어오면 안방 뒤로 좁게 난 마루로 올라오는 계단이 있었고, 밥상은 그 곳을 통해 안방에 들여졌다. 겨울에 부엌에서 식혜가 끓고 있노라면 안방 뒷문을 열고 부엌으로 고개를 내밀어 식혜 거품을 떠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식혜가 다 되기를 기다리곤 했다. 다된 식혜가 들통 째 계단 위에 놓이면, 그대로 살얼음이 얼어서 안방 뒷문을 열고 차가운 식혜를 떠다가 냉큼 아랫목으로 돌아갔더랬다. 안방 뒷마루에는 다디미돌 하나와 다디미 방망이 한 쌍이 있었는데, 쓰는 것을 본 적은 없었고, 한 때 썼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던 것 같다.

안방
안방은 부엌과 닿은 아랫목 쪽으로 마당으로 통하는 창이 있었다. 그 창을 열어놓으면 툇마루와 마당은 물론 대문까지 내다보였다. 지금 생각컨대, 아랫목에 앉아 마당을 둘러싼 집 곳곳은 물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까지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재밌는 창이었다.

밤이면 아랫목 쪽으로 머리를 동으로 둔 채 이불이 깔렸고 서쪽 벽에는 시계와 TV, 전화기, 달력 등이 놓이고 걸리며 안방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북쪽 벽에는 벽 전체를 채우는 검은 자개장이 이불장과 옷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대청
안방에서 가장 큰 문은 네짝으로 되어 대청으로 통하던 문이었다. 대청에서는 서까래가 보였던 것 같은데, 그 높고 어두워 까마득한 천장은 어린 내게 그다지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는지 별다른 기억이 없다. 다만 대청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가운데에 어두운 섀시 문이 있었던 것 같고, 한 가운데 둥근 기둥이 놓여 그 너머로는 툇마루로 이어져 있었다. 신발을 벗지 않고 들르는 손님에 간단한 상을 낼 때는 그 툇마루로 내었던 기억이 있다.

건넌방
대청건너에도 방이 하나 있었다. 집 안에서 안방에 이어 두 번 째로 큰 방이었는데, 역시나 안방에 이어 두 번 째로 자주 드나들던 방이었다. 안방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통하는 네짝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대부분 쓰이지 않고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통할 때가 더 많았던 듯 하다.

마당
부엌 건넌방과 부엌, 안방, 대청, 대청 건넌방이 둘러싸고 있던 마당은 두 계단 쯤 아래로 옴폭했다. 마당 너머로는 붉은 벽돌의 복층 집 북벽이 보였고, 그 벽에 기대어 1m 안되는 폭의 화단이 석축 위로 잇었는데, 한 가운데에 2층 높이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하루는 그 큰 나무를 밤중에 내다봤는데, 나무가 거대한 쥐로 둔갑해 있어서 몹시 놀라며 무서워 했더랬는데, 잠을 깨고 어른들께 꿈 얘기를 해줬더니 악몽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악몽'이라는 말을 처음 배우던 순간이었던 셈이다.

마당 가운데 안채에서 먼 쪽으로 수도가 있었다. 그 수도를 틀고 마당 청소를 하면 물기 머금은 돌냄새, 시멘트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다. 수돗가 쪽으로는 문간방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 이 문간방은 주로 젊은 부부가 세를 들어 살았던 것 같다.

문간방
하루는 이 문간방에 사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가 화장실에 빠져서 건져내지기도 했다. 똥독을 걱정하던 어른과 괜찮다던 아기 엄마의 대화가 어렴풋 한데, 내가 집 밖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나중에 얘기만 들었다. 그 날 부터 어른들은 화장실 갈 때 마다 바닥을 조심하라고 주의 주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변소
변소는 마당에서 다시 한 두 계단 쯤 올라가서 열리는 가장 구석자리 좁은 문을 두고 있었는데, 문을 열면 타일 박힌 바닥이 다시 한 계단 올라가 있고, 조명은 백열등이 달려있었던 것 같다. 따로 변기가 갖춰져 있지는 않았고, 바지를 내리고 마당을 향해 앉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 보면 분뇨와 휴지가 저 아래 고여있는 것이 보이는 구조였다. 똥차가 오면 골목 쪽 문을 열고 굵은 호스를 대고 분뇨를 퍼내곤 했는데, 말끔히 퍼내고 나면 구멍 아래 바닥이 저 아래로 깊게 보여서 더 무서워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문간방
문간방에서 화장실 반대편으로 대문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 대문 왼편, 대문에서 들어설 때는 오른편에 가장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이 방도 역시 세를 놓았는데 주로 혼자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골목 쪽으로 높이 쪽창이 하나 있었고 좁은 방이나마 좁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툇마루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대문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방이라 볕이 가장 어두웠다. 마당에서도 깊숙히 들어와 있고 골목 쪽으로는 쪽창이니 볕 들 구멍이 그다지 없었으리라.

골목
대문을 나서서 오른편을 보면 아래로 잠시 완만한 경사가 지며 전봇대가 하나 보였다. 완만한 경사가 끝나면서 골목이 살짝 왼쪽으로 어긋나 이어졌는데, 그 경사 때문에 화장실 자리 아래쪽으로는 석축 같은 것이 집을 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밖에서 분뇨를 퍼내던 문이 있었다.

골목은 공을 차고 놀기 적당했고, 완만한 경사를 가진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어귀에 작은 복덕방이 하나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 아래부터는 동네였고, 그 위로는 골목이었다. 복덕방 반대편으로는 두부공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고, 두부공장 왼쪽으로는 골목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나 있었다. 두부공장과 복덕방은 좀 더 큰 길을 기준으로 같은 편에 서 있었는데, 그 길 건너편은 작은 가게들이 이어져 있었다. 삼거리 같은 사거리였던 셈이다. 시장 쪽으로 좀 더 가면 오락실이 하나 있었고, 장난감을 파는 문구점도 하나 있었다.

다시 찾은 골목
그 집, 그 골목에서 남겨진 마지막 기억은 80년대 후반 쯤의 것이다. 다시 그 골목을 찾았을 때는 95년 여름 쯤이었다. 골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관문에서처럼 내 몸이 커진 만큼 작아져 있었고, 살던 집은 물론 그 주변도 모두 사라져 정확히 어느 신축 건물이 내가 살던 터에 세워진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아마도 원룸 건물이 들어선 곳이 내가 살던 집의 터인 듯 했다.

사라진 동네
그로부터 다시 15년이 지났으니 10년이 채 안되고 다시 찾아간 95년 보다 또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골목 풍경까지 사진으로 보여주는 지도 서비스 덕분에 다시 찾아 본 내가 살던 골목은 이제 꺾어지던 골목도 곧게 펴지고, 좌우로 즐비하던 개량한옥들도 모두 헐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다가구, 다세대 주택은 어느 것 하나 예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없다. 정원이 딸린 양옥집이던 골목 맞은 편 친구 집도 마당 없는 다가구 주택이 되었다. 마치 그 골목과 그 집에서 보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두 조작된 것 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고향을 잃는 다는 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살던 집의 번지수를 외우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였던 내가 지금 그 곳에 다시 섰을 때 그 장소를 추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는 것은 단 하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남은 하나는 다름 아닌 전봇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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