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하동 오거리에서 체부동 골목으로 접어들면 라파엘의 집 뒤편을 지나 길이 굽으며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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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부동 107번지 건물 전면 / _IMG_0422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잠시 멈춰 가만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집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다른 사연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열린 문 안쪽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다란 복도를 따라 다닥다닥 방문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나타납니다.


쓰레기 배출에 대한 주의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다가구 주택임을 알 수 있지만, 문 간격으로 봐서는 쪽방촌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건물은 흔하지는 않지만 잘 살펴보고 다니면 또 의외로 눈에 띠는 종류의 건물인데, 짐작에는 공장이거나 공원(工員)들을 위한 숙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 앞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제법 길쭉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요. 짐작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처음부터 사람이 거주 할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길쭉한 형태에 실내는 어두침침하게 지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밖으로 나있는 창도 그리 친철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동네의 곳곳을 안내하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이 건물에 대한 궁금증은 좀처럼 해결 할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옛 신문 기사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네요.



都心(鍾路·中區)공장 모두 移轉 - 경향신문(1978.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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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1978년 3월 23일, 종로구와 중구 등 도심지역의 공장을 1980년까지 모두 변두리나 지방으로 이전하는 방침을 확정하여 발표했습니다. 이 때에 이전 명령을 받은 업소 중에는 '태화두부 공장'과 '태성두부'라는 곳이 있는데 체부동 107번지와 통의동 118번지에 각각 소재했다고 합니다.


서울시에서는 도심 인구 과밀 해소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영세한 공장들을 지방으로 옮기면 직원들의 통근만 불편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직원 통근 문제 뿐만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인접할수록 편리한 생필품의 경우에는 '직주근접(職住近接)의 원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비추어도 당시 서울시가 밝힌 공장 이전의 이유가 쉽게 납득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 건물을 보면 공장이 이전되고 나서 직원들은 멀리 떠났을 지는 몰라도 작은 방들이 줄지어 들어서 오히려 도심 인구는 늘어나는 셈이 된 듯 합니다.


'태화두부 공장'과 달리 '태성두부'가 자리하던 통의동 118번지는 포털 지도서비스에서 지번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근 번지를 보아서는 옛 '커피즐겨찾기' 근처로 1978년 6월 자하문로 확장 공사가 착공되면서 철거되고 지금은 길 위에 어디 쯤으로 남게 된 듯 합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골목 어귀에는 두부공장이 있었는데, 뚝딱거리던 소리와 펄펄나던 김이 무척이나 활력있어 보였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그 두부공장도 체부동 107번지 건물과 닮았던 듯 하네요.


혹시 지금도 주거지 가운데에 남아서 두부를 만들고 있는 두부공장이 있을까요? 동네 슈퍼를 가더라도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두부들 사이에 고군분투하는 전국구 두부 브랜드들 밖에 볼 수 없는 지금에, 동네 두부공장과 저녁시간이면 딸랑대던 두부 아저씨 생각이 다시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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